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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해전 (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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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해 해전은 1894년 청일 전쟁 중 황해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일본 연합함대와 청나라 북양함대 간의 전투였다. 일본은 이 해전에서 승리하여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육군의 대륙 진격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일본은 고속·속사 전술을, 청나라는 횡렬진을 사용했으나, 일본의 훈련된 포병대와 쾌속포의 우위로 일본이 승리했다. 이 전투는 단종진에 의한 속사포격전술의 유효성을 입증했으며, 이후 해전의 기본 전술로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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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해전 (1894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황해 해전, 고바야시 기요치카
'황해 해전, 고바야시 기요치카'
명칭황해 해전
원어명 (중국어)黃海海戰 (정체자) / 黄海海战 (간체자) Huáng Hǎi Hǎizhàn (병음)
원어명 (일본어)黄海海戦 Kōkai-kaisen
위치압록강, 조선만
전쟁 정보
분쟁청일 전쟁
날짜1894년 9월 17일
장소황해, 압록강 앞바다
결과일본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일본 제국
교전국 2청나라
지휘관 및 지도자
일본이토 스케유키
일본쓰보이 고조
청나라정여창
청나라류부찬
병력 규모
일본순양함 8척, 코르벳 2척, 포함 및 기타 함선
청나라전함 2척, 순양함 10척, 수뢰정
피해 규모
일본침몰 함선 없음, 4척 대파, 사상자 298명
청나라순양함 5척 침몰/대파, 사상자 850명
전투 상세 정보
전투 명칭압록강 해전
전쟁청일 전쟁
날짜1894년 9월 17일
장소압록강, 조선 황해
결과일본의 승리
교전 세력
일본 제국일본 제국 해군
청나라청나라 해군 (북양 함대)
지휘관 및 지도자
일본이토 스케유키
일본쓰보이 고조
청나라정여창
청나라류부찬
병력
일본7척 방호 순양함, 1척 장갑 순양함, 2척 철갑함, 1척 포함, 1척 수송선
청나라2척 철갑 전함, 1척 해안 전함, 2척 장갑 순양함, 3척 방호 순양함, 1척 혼합 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포함, 2척 어뢰정
사상자 및 피해
일본380명 사상, 5척 방호 순양함 손상, 1척 철갑함 손상
청나라1,350명 사상, 1척 방호 순양함 침몰, 1척 장갑 순양함 침몰, 2척 경순양함 침몰, 1척 혼합 순양함 자침

2. 배경

청일 전쟁 발발 초기 일본은 먼저 군대를 동원해 풍도 해전, 성환 전투, 평양 전투 등을 치러 조선 내의 청나라 병력을 패퇴시켰고, 청나라의 패잔병들이 압록강에서 재집결, 수송선 5척에 실려 요동 반도로 떠났다. 전쟁에 결착을 짓기 위해 일본군 대본영[17]은 일본 해군에게 다음 두가지 전략 목표를 하달했다. 첫째는 북양함대를 저지할 것, 둘째는 황해 제해권 장악이었다.

이에 반해 청나라의 리훙장은 되도록 지구전으로 끌고가 서양 열강들이 청일 양국간의 휴전 및 강화를 놓고 개입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그는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에게 연안방어와 전력보존의 방침을 하달했다. 이 때문에 카바야마 스케노리가 자신의 위장순양함 사이쿄마루(西京丸號)[18]를 몰고 북양함대의 기항인 여순항 근처에서 도발을 했음에도 그들은 좀처럼 대련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1894년 9월 16일 오후 1시, 북양함대는 압록강에서 보병 4,000명을 태운 수송선 5척을 맞이하기 위해 마침내 대련만을 나왔다. 수송선이 대련항 근처 다후산(大狐山)에서 육군을 상륙시키는 사이 북양함대는 다후산 앞바다에서 훈련 중이었다.

1894년 9월 16일 오후 5시, 황해도 최서단 척백곶에 몰래 정박해 있던 일본 연합함대 본대(이하 연합함대)와 제1유격대(연합함대의 별동대)가 북양함대 출격 정보를 입수, 결전을 치르기 위해 침로를 잡고 출항했다. 여기에 비정규편성으로 아카기와 위장순양함 사이쿄마루가 뒤따랐는데, 아카기 호는 흘수가 낮은 점을 이용, 영국인 출신 존 윌슨 제독의 지휘하에 연안과 도서 지역 탐색을 수행했고 사이쿄마루는 카바야마 스케노리 함장과 이주인 고로 중좌 등을 태워 전황감시선으로 이용됐다.

1894년 9월 17일 오전 10시 경, 북양함대와 일본 연합함대가 동시에 서로를 발견, 조우했다. 제1유격대는 쓰보이 고조 소장이 이끄는 4척의 전함, 즉 기함 요시노, 다카치호, 아키쓰시마, 나니와 함의 순으로 앞에 섰고, 이어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이토 스케유키가 지휘하는 6척의 전함인 기함 마쓰시마, 지요다, 이쓰쿠시마, 하시다테, 히에이, 후소 함의 순으로 제1유격대의 뒤를 받치는 단종진을 만들었다. 이에 맞서 북양함대는 리싸 해전(Battle of Lissa, 1866)에서의 오스트리아 함대를 모방해 13척의 전함과 2척의 어뢰정으로 횡렬진을 형성해 마침내 해전이 시작됐다.

2. 1. 일본의 전략

일본의 초기 전략은 대한제국에서의 작전에 매우 중요한 해상 제해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해상 제해권 확보는 일본이 본토로 병력을 수송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일본 제국 육군 제5사단은 인천 서해안에 상륙하여 청나라군을 한반도 북서쪽으로 밀어내고 베이양 함대를 황해로 유인하여 결정적인 해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이 교전의 결과에 따라 일본은 세 가지 선택을 할 예정이었다. 만약 연합 함대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면 일본 육군의 대규모 병력이 산해관과 톈진 사이의 해안에 즉시 상륙하여 중국군을 격파하고 전쟁을 신속하게 종결할 것이다. 만약 교전이 무승부로 끝나 어느 쪽도 해상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육군은 한국 점령에 집중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합 함대가 패배하여 해상 제해권을 상실할 경우, 육군의 주력은 일본에 남아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준비하고, 한국에 주둔한 제5사단은 버티면서 후방 방어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받게 될 것이다.

2. 2. 청나라의 움직임

청나라와 일본 간의 한반도에 대한 긴장이 고조되자, 청나라 정부는 1894년 7월 말 증기선 3척을 징발하여 증원군을 수송하고, 순양함 지위안/濟遠중국어과 포함 ''광이''(廣乙), 차오장/操江중국어 등 군함 3척을 호위함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풍도 해전에서 일본 함대가 청나라 군함을 공격하여 ''지위안''은 도주, ''광이''는 좌초, ''차오장''은 나포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1,200명의 중국군을 수송하던 ''고승호''(高陞號)를 격침시켜 8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프랑스 신문 ''르 프티 저널''의 삽화로, 프랑스 함선 ''르 리옹''의 선원들이 ''고승''의 생존자를 구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딩루창 제독은 풍도 해전 소식을 듣고 7월 26일 11척의 군함과 7척의 어뢰정을 이끌고 웨이하이웨이를 출발, 한국 해안을 순찰했으나 일본군과 마주치지 못하고 7월 28일 돌아왔다. 9월 초, 리훙장은 평양의 중국군 증원을 위해 베이양 함대를 동원, 수송선을 대동강 입구까지 호위하기로 결정했다.

9월 12일, 정찰 중이던 일본 순양함 ''요시노''와 ''나니와''가 웨이하이웨이 인근에 나타나자, 딩 제독은 일본 주력 함대로 오인하고 다롄을 출발하여 웨이하이웨이로 향했다. 평양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한반도 내 중국 군사력은 제거되었고, 딩 제독은 다음 방어선을 압록강으로 예상, 병력을 재배치하기로 결정했다.

9월 16일, 베이양 함대의 주력 부대는 5척의 수송선을 호위하며 다롄 만을 출발, 압록강 입구에 도착했다. 9월 17일, 함대는 훈련 후 이전 닻으로 돌아갔고, 오전 11시 28분, 남서쪽에서 접근하는 미확인 함선의 연기를 발견했다.

3. 함대 구성

일본 연합함대는 쓰보이 고조 소장 휘하의 제1유격대와 이토 스케유키 중장 휘하의 본대로 구성되었다. 제1유격대는 요시노, 다카치호, 아키쓰시마, 나니와 등 4척의 빠른 순양함으로 구성되어 기동성을 강조했다.

제1유격대 기함 요시노


본대는 마쓰시마(기함), 지요다, 이쓰쿠시마, 하시다테, 후소, 히에이 등 6척의 순양함과 장갑함으로 구성되어 화력에 중점을 두었다.

히에이


후소


이 외에도 개조된 여객선 사이쿄마루와 포함 아카기가 참전했다. 해군 참모 총장 가바야마 스케노리 제독이 사이쿄마루에 탑승하여 전투를 시찰했다.

딩루창 제독이 이끄는 청나라 북양함대는 횡렬진을 기본 대형으로 삼았다.[4] 2척의 철갑함 정원과 진원을 중앙에 배치하고, 신형 함선과 노후 함선을 좌우에 배치했다. 핑위안이 이끄는 4척의 함선은 강을 따라 호송 임무를 수행한 후 합류할 예정이었다.[4]

북양함대는 서류상으로는 일본보다 우수한 함선을 보유한 것으로 보였으나,[4] 실제로는 함선의 노후화, 유지 보수 부족, 승무원 기강 해이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였다.[4][14] 주요 함선의 장갑과 일제 사격 중량은 일본 함선의 속사포에 의해 상쇄되었으며, 포탄의 낮은 포구 속도와 빈약한 관통력, 낮은 정확도는 단점으로 작용했다.[4]

전술적으로, 중국 해군 함선은 기본적인 지침만 가지고 전쟁에 임했으며, 모든 함선은 기함의 움직임을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4] 훈련 부족과 탄약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으며, 부패로 인해 많은 포탄이 시멘트나 도자기로 채워지거나 구경이 맞지 않아 사용할 수 없었다.[4]

북양함대의 구성 함선은 다음과 같다.

  • 중앙대
  • 정원 (기함)
  • 진원
  • 우익대
  • 양위
  • 초용
  • 정원
  • 경원
  • 좌익대
  • 래원
  • 치원
  • 제원
  • 광갑
  • 별동대 (북동 원방에 위치)
  • 평원
  • 광병
  • 복룡
  • 제1호 (어뢰정)

3. 1. 일본 연합함대

일본 연합함대는 쓰보이 고조 소장 휘하의 제1유격대와 이토 스케유키 중장 휘하의 본대로 구성되었다. 제1유격대는 요시노, 다카치호, 아키쓰시마, 나니와 등 4척의 빠른 순양함으로 구성되어 기동성을 강조했다.

본대는 마쓰시마(기함), 지요다, 이쓰쿠시마, 하시다테, 후소, 히에이 등 6척의 순양함과 장갑함으로 구성되어 화력에 중점을 두었다.

이 외에도 개조된 여객선 사이쿄마루와 포함 아카기가 참전했다. 해군 참모 총장 가바야마 스케노리 제독이 사이쿄마루에 탑승하여 전투를 시찰했다.

3. 2. 청나라 북양함대

딩루창 제독이 이끄는 청나라 북양함대는 횡렬진을 기본 대형으로 삼았다.[4] 2척의 철갑함 정원과 진원을 중앙에 배치하고, 신형 함선과 노후 함선을 좌우에 배치했다.[4] 핑위안이 이끄는 4척의 함선은 강을 따라 호송 임무를 수행한 후 합류할 예정이었다.[4]

북양함대는 서류상으로는 일본보다 우수한 함선을 보유한 것으로 보였으나,[4] 실제로는 함선의 노후화, 유지 보수 부족, 승무원 기강 해이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4][14] 주요 함선의 장갑과 일제 사격 중량은 일본 함선의 속사포에 의해 상쇄되었으며, 포탄의 낮은 포구 속도와 빈약한 관통력, 낮은 정확도는 단점으로 작용했다.[4]

전술적으로, 중국 해군 함선은 기본적인 지침만 가지고 전쟁에 임했으며, 모든 함선은 기함의 움직임을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4] 훈련 부족과 탄약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으며, 부패로 인해 많은 포탄이 시멘트나 도자기로 채워지거나 구경이 맞지 않아 사용할 수 없었다.[4]

북양함대의 구성 함선은 다음과 같다.

  • 중앙대
  • 정원 (기함, 함장: 유보첨)
  • 진원 (함장: 임태증)
  • 우익대
  • 양위 (함장: 임리중)
  • 초용 (함장: 황건훈)
  • 정원 (함장: 엽조규)
  • 경원 (함장: 임영승)
  • 좌익대
  • 래원 (함장: 구보인)
  • 치원 (함장: 등세창)
  • 제원 (함장: 방백겸)
  • 광갑 (함장: 오경영)
  • 별동대 (북동 원방에 위치)
  • 평원 (함장: 이화)
  • 광병 (함장: 정벽광)
  • 복룡 (함장: 채정간)
  • 제1호 (수뢰정)

4. 전투 과정

12시 52분, 일본 기함 마쓰시마정원함에 포격을 시작하면서 황해 해전이 개시되었다.[19] 북양함대는 일본 제1유격대를 향해 사격했으나, 제1유격대는 3분 후 북양함대 우익의 양위함(揚威艦)과 초용함(超勇艦)에 집중 포격을 가했다. 북양함대는 일본 함대에 충각 전술을 시도했으나, 속도가 더 빨라 실패하고 오히려 십자포화를 받아 화염에 휩싸였다.[19]

13시 5분, 초용함이 침몰하고 양위함이 대록도(大鹿島) 남방에서 좌초하면서 북양함대 우익이 무너졌다.[19] 13시 6분, 평원함(平遠艦)과 광병함(広丙)을 비롯한 청나라 별동함대가 남하하면서 일본 함대에도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기함 요시노가 우현 뒷갑판에 피격당하고, 기함 마쓰시마도 6인치 포탄을 맞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19]

13시 14분, 일본 함대 후방에서 히에이함이 고립되자, 정원함과 래원함(來遠艦)이 충각 전술을 시도했으나, 히에이 함장 사쿠라이 키쿠노조의 기지로 두 함선 사이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정원함과 래원함(來遠艦)은 후소함을 노리고 다시 충각 전술을 시도했다.[19]

13시 20분, 일본 제1유격대는 북쪽에서 남하하는 청나라 별동대를 견제하기 위해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후소함은 충각 전술을 회피했으나, 이 과정에서 아카기함과 사이쿄마루함이 적함 전면에 노출되었다. 아카기함에 맹렬한 포격이 가해져 함장 사카모토 하치로타 소좌가 전사했고, 사토 테츠타로 1등 항해사가 지휘를 넘겨받아 반격하여 래원함(來遠艦)에 타격을 주었다.[19]

13시 30분, 일본 함대 사령관 이토 제독은 북양함대의 배후를 노리기 위해 회전 기동을 지시했다. 제1유격대는 남하하는 일본 함대와 나란히 기동하려 했으나, 타이밍이 맞지 않아 일본 함대의 뒤를 따랐다.[19]

14시, 전투 능력을 상실한 코르벳함 히에이가 '본함 화재로 인해 열외하겠음'이라 긴급타전하면서 동북 방면으로 이탈했다.

14시 15분, 전황감시선 사이쿄마루로부터 '히에이, 아카기 위험'이란 무전을 받고 제1유격대가 북쪽으로 향했다. 당시 아카기는 추격해오는 래원함에 포탄을 명중시키는 등, 호랑이 아가리를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사이쿄마루는 기관실과 방향타를 피격당한 채 '본함 기관 고장' 무전을 재차 보냈다. 사이쿄마루에서 뿜어져나오는 연기를 관측한 평원함과 광병함(이상 전함), 그리고 복룡함(어뢰정) 등이 남하해 쾌속항진해 왔다. 사이쿄마루는 연합함대의 눈이었으며 무장과 장갑이 빈약해 공격을 오래 버틸 수 없었으므로 빨리 구조해야 했다.

14시 30분, 제1유격대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며 별동대를 향해 불을 뿜었다. 나니와사이쿄마루를 피하기 위해 잠시 기관을 정지하는 것을 확인한 정원함과 진원함(鎭遠艦) 등이 나니와 호 쪽으로 다가왔다.

14시 40분, 사이쿄마루는 접근해온 복룡함으로부터 2차례 어뢰공격을 받았고, 3발 째는 배 밑으로 그냥 통과했다. 곧 도착한 제1유격대는 히에이, 아카기, 사이쿄마루의 안전을 확인함과 동시에 청군 별동대의 후미를 노리고 들어갔다.

15시 10분, 연합함대 본대는 동진하여 적함대의 동쪽에서 돌아들어가, 정원함과 진원함을 집중포격했다. 제1유격대도 우현으로 키를 8번 돌려, 3.7킬로 거리에서 본함대와 함께 적함대를 때려댔다. 십자포화를 맞고 정원함(定遠艦), 진원함, 치원함, 정원함(靖遠艦)에 화재가 발생, 진형이 무너졌다. 이때 제원함과 광갑함이 전장에서 이탈, 여순 방향으로 후퇴했다. 그나마도 광갑함은 도망중 좌초돼 버려졌다. 이는 근대 이후의 해전에서 유일한 적전 도망 사례이다. 풍도 해전에도 참전했었던 제원함의 함장 방백겸은 그 책임을 물어 청일 전쟁이 끝난 후 참수형에 처해졌다. 방백겸의 이러한 행위는 청나라 해군, 나아가 청나라 전체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매우 비겁한 행위였다.

15시 30분, 진원함의 12인치 포탄이 '마쓰시마'의 좌현 포탑에 직격됐다. 포탑 안에 적재된 장약에 불이 붙어 폭발, 28명이 즉사하고 마쓰시마가 대파됐다. 당시 마쓰시마 호의 승조원, 미우라 토라타로(三浦虎太郞) 3등수병은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함 침몰은 아직입니까”라고 부함장 무카야마 싱고에게 물었고, 질문을 받은 무카야마가 “적함은 전투능력을 상실했다”고 답했다. 이 때 일화가 후일 일본군 군가 '용감한 수병(『勇敢なる水兵』)'의 가사로 만들어졌다. 아직 전투능력이 남아있던 치원함이 단독으로 연합함대로 돌진, 동귀어진[20]을 노렸으나 역시 집중포화를 맞고 흘수선 아래에 구멍이 뚫려 침몰했다.

16시 7분, '마쓰시마'는 함교 근처의 화재로 기함기능을 상실했다. 이토 사령관은 불관기(不管旗)를 게양해 이를 알렸다. 이를 본 연합함대의 다른 함정들이 기함을 보호하기 위해 기함 주변으로 집결했다. 한편 제1유격대는 경원함 등을 추격하여 북상했다. 북양함대는 지리멸렬하여 정원함과 진원함을 남겨둔채 패퇴했다.

16시 48분, 제1유격대 기함 요시노는 경원함을 따라잡고 포격을 가했다. 경원함은 불길에 휩싸여 17시 29분 경 함수 부분부터 침몰했다. 제1유격대는 다른 청국 함선들을 추격하려 했으나 본대복귀 신호를 받고 물러났다.

연합함대는 함대를 재편성, 손상된 함들을 본국으로 보내고 기함 기능을 '마쓰시마'에서 '순양함 하시다테'로 변경했다. 그 사이 북양함대의 잔여함들이 여순항으로 후퇴했다. 북양함대의 패퇴는 청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일본 해군의 우위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연합함대는 다음날인 18일 다시 북상하여 적함대와 다시금 해전을 벌이려 했으나 여의치 못하고 다시 그 다음날인 19일 8시를 기해 여순항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오른쪽


''압록강 해전에서의 일본 군함 사이쿄마루'', 하세가와 치쿠요, 1894

4. 1. 해전#1 (12시 52분부터 14시까지 상황)

12시 52분, 일본 기함 마쓰시마정원함에 포격을 시작하면서 황해 해전이 개시되었다.[19] 북양함대는 일본 제1유격대를 향해 사격했으나, 제1유격대는 3분 후 북양함대 우익의 양위함(揚威艦)과 초용함(超勇艦)에 집중 포격을 가했다. 북양함대는 일본 함대에 충각 전술을 시도했으나, 속도가 더 빨라 실패하고 오히려 십자포화를 받아 화염에 휩싸였다.[19]

13시 5분, 초용함이 침몰하고 양위함이 대록도(大鹿島) 남방에서 좌초하면서 북양함대 우익이 무너졌다.[19] 13시 6분, 평원함(平遠艦)과 광병함(広丙)을 비롯한 청나라 별동함대가 남하하면서 일본 함대에도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기함 요시노가 우현 뒷갑판에 피격당하고, 기함 마쓰시마도 6인치 포탄을 맞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19]

13시 14분, 일본 함대 후방에서 히에이함이 고립되자, 정원함과 래원함(來遠艦)이 충각 전술을 시도했으나, 히에이 함장 사쿠라이 키쿠노조의 기지로 두 함선 사이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정원함과 래원함(來遠艦)은 후소함을 노리고 다시 충각 전술을 시도했다.[19]

13시 20분, 일본 제1유격대는 북쪽에서 남하하는 청나라 별동대를 견제하기 위해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후소함은 충각 전술을 회피했으나, 이 과정에서 아카기함과 사이쿄마루함이 적함 전면에 노출되었다. 아카기함에 맹렬한 포격이 가해져 함장 사카모토 하치로타 소좌가 전사했고, 사토 테츠타로 1등 항해사가 지휘를 넘겨받아 반격하여 래원함(來遠艦)에 타격을 주었다.[19]

13시 30분, 일본 함대 사령관 이토 제독은 북양함대의 배후를 노리기 위해 회전 기동을 지시했다. 제1유격대는 남하하는 일본 함대와 나란히 기동하려 했으나, 타이밍이 맞지 않아 일본 함대의 뒤를 따랐다.[19]

4. 2. 해전#2 (14시에서 17시까지 상황)

14시, 전투 능력을 상실한 코르벳함 히에이가 '본함 화재로 인해 열외하겠음'이라 긴급타전하면서 동북 방면으로 이탈했다.

14시 15분, 전황감시선 사이쿄마루로부터 '히에이, 아카기 위험'이란 무전을 받고 제1유격대가 북쪽으로 향했다. 당시 아카기는 추격해오는 래원함에 포탄을 명중시키는 등, 호랑이 아가리를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사이쿄마루는 기관실과 방향타를 피격당한 채 '본함 기관 고장' 무전을 재차 보냈다. 사이쿄마루에서 뿜어져나오는 연기를 관측한 평원함과 광병함(이상 전함), 그리고 복룡함(어뢰정) 등이 남하해 쾌속항진해 왔다. 사이쿄마루는 연합함대의 눈이었으며 무장과 장갑이 빈약해 공격을 오래 버틸 수 없었으므로 빨리 구조해야 했다.

14시 30분, 제1유격대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며 별동대를 향해 불을 뿜었다. 나니와사이쿄마루를 피하기 위해 잠시 기관을 정지하는 것을 확인한 정원함과 진원함(鎭遠艦) 등이 나니와 호 쪽으로 다가왔다.

14시 40분, 사이쿄마루는 접근해온 복룡함으로부터 2차례 어뢰공격을 받았고, 3발 째는 배 밑으로 그냥 통과했다. 곧 도착한 제1유격대는 히에이, 아카기, 사이쿄마루의 안전을 확인함과 동시에 청군 별동대의 후미를 노리고 들어갔다.

15시 10분, 연합함대 본대는 동진하여 적함대의 동쪽에서 돌아들어가, 정원함과 진원함을 집중포격했다. 제1유격대도 우현으로 키를 8번 돌려, 3.7킬로 거리에서 본함대와 함께 적함대를 때려댔다. 십자포화를 맞고 정원함(定遠艦), 진원함, 치원함, 정원함(靖遠艦)에 화재가 발생, 진형이 무너졌다. 이때 제원함과 광갑함이 전장에서 이탈, 여순 방향으로 후퇴했다. 그나마도 광갑함은 도망중 좌초돼 버려졌다. 이는 근대 이후의 해전에서 유일한 적전 도망 사례이다. 풍도 해전에도 참전했었던 제원함의 함장 방백겸은 그 책임을 물어 청일 전쟁이 끝난 후 참수형에 처해졌다.

15시 30분, 진원함의 12인치 포탄이 '마쓰시마'의 좌현 포탑에 직격됐다. 포탑 안에 적재된 장약에 불이 붙어 폭발, 28명이 즉사하고 마쓰시마가 대파됐다. 당시 마쓰시마 호의 승조원, 미우라 토라타로(三浦虎太郞) 3등수병은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함 침몰은 아직입니까”라고 부함장 무카야마 싱고에게 물었고, 질문을 받은 무카야마가 “적함은 전투능력을 상실했다”고 답했다. 이 때 일화가 후일 일본군 군가 '용감한 수병(『勇敢なる水兵』)'의 가사로 만들어졌다. 아직 전투능력이 남아있던 치원함이 단독으로 연합함대로 돌진, 동귀어진[20]을 노렸으나 역시 집중포화를 맞고 흘수선 아래에 구멍이 뚫려 침몰했다.

16시 7분, '마쓰시마'는 함교 근처의 화재로 기함기능을 상실했다. 이토 사령관은 불관기(不管旗)를 게양해 이를 알렸다. 이를 본 연합함대의 다른 함정들이 기함을 보호하기 위해 기함 주변으로 집결했다. 한편 제1유격대는 경원함 등을 추격하여 북상했다. 북양함대는 지리멸렬하여 정원함과 진원함을 남겨둔채 패퇴했다.

16시 48분, 제1유격대 기함 요시노는 경원함을 따라잡고 포격을 가했다. 경원함은 불길에 휩싸여 17시 29분 경 함수 부분부터 침몰했다. 제1유격대는 다른 청국 함선들을 추격하려 했으나 본대복귀 신호를 받고 물러났다.

연합함대는 함대를 재편성, 손상된 함들을 본국으로 보내고 기함 기능을 '마쓰시마'에서 '순양함 하시다테'로 변경했다. 그 사이 북양함대의 잔여함들이 여순항으로 후퇴했다. 연합함대는 다음날인 18일 다시 북상하여 적함대와 다시금 해전을 벌이려 했으나 여의치 못하고 다시 그 다음날인 19일 8시를 기해 여순항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5. 결과 및 영향

황해 해전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며, 일본은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육군의 대륙 진격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 해전은 단종진에 의한 속사포격전술의 유효성을 입증했으며, 이후 해전의 기본 전술로 정착되었다. 일본 해군은 고속, 속사 전술을 주로 하는 부대(황해 해전의 경우 별동대인 제1유격대)와 저속, 중무장 함대(연합함대 본대)를 분리 운용하는 교리를 확립했다. 이러한 전술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독일 양국이 전함 부대와 고속 순양함 부대를 나누어 운용하는 등 근현대 해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 해군 내에서는 속도가 느린 함선이 청나라 해군의 한가운데에 남겨지거나, 다른 함정의 사격 선상에 다른 배가 끼어들어 포격을 방해하는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기함이 대파되어 추격을 단념했던 것에 대해서도, 한층 더 추격해 공격을 속행해야 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한편, 일본 해군은 전투 종료 후 침몰한 함정에서 탈출한 청나라 수병들을 구조하지 않고 방치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청나라는 패전의 책임을 이홍장과 제독 정여창에게 돌렸으며, 정여창은 자결하고 제원함 함장 방백겸 등은 처형되었다. 류쿤이는 함대 증원을 거부하여 남양 함대 지휘관이 장즈둥으로 교체되었고, 장즈둥은 북양 함대를 증원하기 위해 순양함 5척을 조직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청일 전쟁에서 승기는 일본으로 급격히 넘어가게 되었으며, 청나라 황실은 권위를 잃고 민족주의와 혁명 운동이 촉발되었다.

런던 타임스를 포함한 많은 유럽 신문들이 일본의 승리를 보도하며, 서구식 방법과 기술의 급속한 수용 덕분으로 평가했다. 미국의 해군 장관 힐러리 A. 허버트를 비롯한 일부 군사 분석가들은 중국 탄약의 품질이 더 좋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평가하며 전투를 '거의 무승부'라고 불렀다. 하지만, 중국의 패배에는 함선 노후화, 훈련 부족, 부족한 해군 전술 등 다른 요인들도 작용했다. 당시 화력 통제 시스템은 초창기였기 때문에 양측 모두 유효타를 거의 기록하지 못했다. 한편, 마크 피티와 데이비즈 에반스는 일본의 승리 요인으로 화력 우세를 꼽았으며, 특히 훈련된 포병대가 다루는 쾌속포의 압도적인 우위를 강조했다.

북양 함대의 잔존 세력은 뤼순커우 해전에서 2차 충돌을 피하기 위해 웨이하이웨이로 철수했지만, 웨이하이웨이 전투에서 일본 육해군의 합동 공격으로 최종 파괴되었다.

황해 해전과 1894-1895년 해군 패배는 2014년 1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 이후 중국 역사가와 해군 장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된 주제가 되었다.

청나라 「징위안」 신부
원구사료관 소장

6. 전투 참가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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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해전 (1894년) 전투 참가 함정
청나라 (북양함대)일본 (연합함대)


7. 분석

1866년 리사 해전 이후 최초의 함대 교전이었던 황해 해전은 전 세계 해군 참모진에 의해 전술적 교훈을 얻기 위해 연구되었다. 두 번의 함대 교전 결과가 상반되어 서로 상쇄되는 듯하여, 그 교훈은 어느 정도 불분명했다. 리사 해전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충각을 정면 공격에 사용했으며, 횡렬 대형을 사용한 반면, 황해 해전은 종열 대형에서 발사된 측면 함포 사격으로 승리했다.

이 해전의 과정과 결과로부터 몇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첫째는 종열 대형이 가장 유연하고 단순한 움직임을 유지하며, 전술적 혼란을 최소화하고 측면 사격을 최대화하는 최적의 대형이라는 점이었다. 횡렬 대형에 대한 반론은 아직 완전히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딩 유창의 부하들이 함대 기동을 숙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군이 의도적으로든 우연히든 채택한 쐐기 대형은 지휘관이 함대 기동을 숙달한 경우에만 효과적일 수 있었다. 둘째, 리사 해전과 황해 해전의 공통 분모는 승리자가 분리된 함대 편대로 싸웠다는 점이었다. 이 배치는 전술적 유연성을 제공했고, 결과적으로 전투의 혼란 속에서 기동의 선택지를 넓혔다.

중국 해군은 전투 준비 부족, 불량한 탄약, 통신 및 기강 부족으로 인해, 적어도 한 건의 프래깅 사례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일본군은 매우 유리한 조건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황해 해전에서의 승리는 제해권을 확립하고, 중국 군대의 약점, 그리고 일본 군대의 강점을 보여주었다. 뉴욕 타임스는 이 해전을 워털루 전투에 비유했다.[12]

8. 전후

북양 함대의 잔존 세력은 수리를 위해 뤼순커우로 후퇴했지만, 뤼순커우 해전에서 일본 함대와의 2차 충돌을 피하기 위해 웨이하이웨이로 철수했다. 일본은 퇴각하는 함대를 추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딩위안과 전위안이 경미한 손상만 입었고, 일본은 전함의 탄약 부족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양 함대의 남은 전력은 웨이하이웨이에서 일본 육해군의 합동 공격으로 최종 파괴되었다. 이후, 뤼순항으로 도주한 북양함대는 육지 측에서 뤼순을 포위당하는 형세가 되었고, 더 나아가 그곳에서 철수하여 웨이하이웨이로 도주하여 어뢰정 공격과 육상에서의 공격으로 인해 전군이 항복했다. 일본이 제해권을 거의 장악함에 따라 대륙으로의 파병이 원활하게 진행되어 이후의 작전 행동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야루 강 해전에서의 북양 함대의 패배는 일본에게 주요한 선전 승리였으며, 런던 타임스(London Times), 르 탕(Le Temps), 상트페테르부르크스케 베도모스티(Sankt-Peterburgskie Vedomosti)를 포함한 많은 주요 유럽 신문들이 머리기사로 보도하며 일본의 승리를 서구식 방법과 기술의 급속한 수용 덕분으로 평가했다. 많은 이들은 북양 함대의 외국 고문(특히 맥기핀)의 신속한 행동이 함대의 전멸을 막고, 가장 심하게 손상된 중국 함선들조차 교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 싸울 수 있도록 한 공로라고 평가했다. 미국의 해군 장관 힐러리 A. 허버트를 비롯한 일부 동시대 군사 분석가들은 이 전투를 '거의 무승부'라고 불렀는데, 중국이 여러 군함을 잃었지만 일본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중국 탄약의 품질이 더 좋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버트 외에도 앨프레드 테이어 마한과 윌리엄 F. 핼시 시니어 등 여러 미국 관리들이 이 전투에 대한 분석을 발표했다.

하지만, 중국의 패배에는 중국 함선의 대부분이 노후화되고 쓸모없으며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는 점과 같은 다른 요인들이 작용했다. 또한 훈련되지 않은 승무원과 부족한 해군 전술도 문제였다. 마크 피티와 데이비즈 에반스는 일본의 승리의 주요 요인은 화력 우세였으며, 특히 훈련된 규율 있는 포병대가 다루기에 치명적인 쾌속포의 압도적인 우위였다고 말한다. 당시 화력 통제 시스템은 초창기였고, 상당한 진전은 수년 후에 이루어졌으며, 어느 쪽도 발사된 총알의 전체 수에서 유효타를 거의 기록하지 못했다. 한 동시대 유럽 외교관도 이에 동의하며, 일본 해군의 "승리는 일본의 선원들의 기술과 대담함 덕분이었고, 그들이 운용한 배 때문은 아니었다"고 언급했다.

중국 정부는 처음에는 자국 함대의 패배를 부인하다가, 중국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총독 이홍장과 제독 딩루창에게 돌렸고, 두 사람 모두 강등되고 훈장을 박탈당했다. 그들의 부하와 친척들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들의 직책에 남아 웨이하이웨이에서 북양 함대의 최종 파괴를 감독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체면을 살리려는 시도는 충분하지 않았고, 외국 언론은 중국의 많은 주장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 국제 사회의 눈앞에서 신뢰를 잃었다. 야루 강 해전과 1894-1895년 해군 패배는 2014년 1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 이후 중국 역사가와 해군 장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된 주제가 되었다.

이것이 광범위한 규모에서 전드레드노트 기술을 포함하는 최초의 전투는 아니었지만(1884년 청불 전쟁의 푸저우 해전이 이보다 앞섰다), 해군 관찰자들이 고려해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었다.

류쿤이는 그의 함대에서 북쪽으로 증원을 보내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원수의 지시로 장즈둥으로 남양 함대의 지휘관이 교체되었다. 장즈둥은 북양 함대의 손실을 상쇄하기 위해 남양 함대에서 5척의 순양함을 조직하여 북양 함대를 증원하기 시작했다.

전술 면에서는 이 해전에서 나타난 단종진에 의한 속사포를 주체로 한 포격 전술의 유효성이 세계에 널리 퍼져 해전의 기본으로 정착되었다. 일본 해군에서는 고속·속사를 주체로 하는 부대(제1유격대)와 저속·중화력 주체의 부대(연합함대 본대)로 나누어 운용하는 형태가 이 해전 이후 기본형이 되었고 해군이 소멸하는 1945년까지 이어졌다. 해외에서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독일 양국이 전함 부대와 고속의 순양전함 부대로 나누어 운용하는 등, 그 영향이 엿보인다.

참조

[1] 간행물 War History Studies (Chinese) Vol. 2
[2] 서적 McGiffin (1968)
[3] 서적 Andrade (2016)
[4] 웹사이트 The Battle of the Yalu, Personal Recollections by the Commander of the Chinese Ironclad Chen Yuen http://www.navyandma[...] 2013-08-04
[5] 웹사이트 马吉芬:大东沟海战丁汝昌重伤因被炮风震倒 http://phtv.ifeng.co[...] 2014-10-05
[6] 서적 Under the dragon flag: My experiences in the Chino-Japanese war https://books.google[...] Frederick A. Stokes Company 2011-08-07
[7] 문서 McGiffin
[8] 웹사이트 (转帖连载126)大清海军的落日辉煌——"济远"撞坏"扬威"考正 http://www.360doc.co[...] 2014-10-05
[9] 서적 Tōgō heihachirō to akiyama saneyuki PHP Kenkyūjo
[10] 간행물 War History Studies (Chinese) Vol. 2
[11] 문서 McGriffin
[12] 서적 The Sino-Japanese War of 1894–1895: Perceptions, Power, and Primac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 학술지 Same Water Different Dreams: Salient Lessons of the Sino-Japanese War for Future Naval Warfare https://www.usmcu.ed[...] 2020-Fall
[14] 서적 McGiffin (1968)
[15] 웹사이트 黄海鏖兵 : 甲午战争中的大东沟海战(三) http://www.beiyang.o[...] 陈悦 2015-10-11
[16] 문서 松田十刻 《東郷平八郎と秋山真之》P187
[17] 문서 대본영(大本營): 일본군 참모 본부를 지칭
[18] 문서 사이쿄마루 호: 원래 미츠비시 상선이 소유했던 우편운반선. 청일전쟁을 앞두고 일본 해군이 개조해 순양함 대용으로 썼다.
[19] 문서 충각전술: 배를 부딪혀 상대함의 진로 방해, 속도 저하, 혹은 침몰을 유도하는 전술
[20] 문서 동귀어진(同歸於盡): 같이 파멸의 길로 끌고 들어감. 정식 사자성어가 아닌 무협소설에서 비롯된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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